I. 들어가며
주택이든 상가이든, 분양을 받거나 임대차계약을 체결할 때 신탁부동산을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부동산가격 상승기에 소위 프로젝트 파이낸싱[Project Financing(PF)]이 활발하게 진행되면서 신탁부동산을 접할 기회가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탁이 무엇인지’, ‘신탁의 법률관계가 어떠한지’에 대하여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심지어 오해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자연스럽게 신탁부동산에 관한 많은 법률 문제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이번 칼럼에서는 신탁부동산에 관한 여러 문제들 중 특히 신탁부동산의 임대차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II. 신탁 전 임대차의 경우
신탁을 하기 전에 ‘대항력 있는 임대차’가 있었다면, 그 임대차의 임차인은 수탁자에게 대항할 수 있습니다. 즉, 「주택임대차보호법」이나 「상가건물 임대차보호법」이 적용되는 임대차, 임대차의 등기를 한 임대차(민법 제621조) 등에서 임차인은, 자신이 대항력을 갖춘 이후 임대차의 목적이 되는 부동산이 신탁되더라도 수탁자에게 대항할 수 있습니다.
임대차보증금의 반환도 수탁자에게 청구할 수 있습니다. 수탁자가 기존 임대인의 지위까지 승계하기 때문입니다. 「주택임대차보호법」 제3조 제4항은 “임차주택의 양수인(그밖에 임대할 권리를 승계한 자를 포함한다)은 임대인 지위를 승계한 것으로 본다.”라고 규정하고 있고, 「상가건물 임대차보호법」 제3조 제2항은 “임차건물의 양수인(그밖에 임대할 권리를 승계한 자를 포함한다)은 임대인의 지위를 승계한 것으로 본다.”라고 규정하고 있는데, 대법원은 위와 같은 규정을 근거로 ‘임대차보증금반환채무는 양수인에게 이전된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습니다(대법원 1994. 3. 11. 선고 93다29648 판결).
주택임대차보호법 제3조 제1, 2항은, 주택의 임차인은 그 건물에 입주하고 주민등록을 함으로써 제3자에 대하여 대항력을 갖추게 되고, 대항력을 갖춘 후에 임차건물이 양도된 경우 양수인은 임대인의 지위를 승계한 것으로 본다고 규정하고 있는바, 임대부동산의 소유권이 이전되고 그 양수인이 임대인의 지위를 승계한 경우에는 임대차보증금 반환채무도 부동산의 소유권과 결합하여 일체로서 임대인의 지위를 승계한 양수인에게 이전되는 것이므로, 양도인의 보증금반환채무는 소멸하는 것으로 해석하여야 한다.
위탁자가 수탁자 앞으로 소유권이전등기를 마치게 되면 대내외적으로 소유권이 수탁자에게 완전히 이전되므로 수탁자는 임대인의 지위를 승계하게 되고(대법원 2002. 4. 12. 선고 2000다70460 판결), 따라서 임차인은 수탁자에게 임대차보증금의 반환을 청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설사 위탁자와 수탁자가 신탁계약에 ‘수탁자에게 보증금반환의무가 없다’는 취지로 규정하더라도, 이미 대항력을 갖춘 임차인에게는 대항할 수 없습니다.
III. 신탁 후 임대차의 경우
신탁부동산의 임대권한은 원칙적으로 수탁자에게 있습니다. 부동산의 신탁에 있어서 수탁자 앞으로 소유권이전등기를 마치게 되면 대내외적으로 소유권이 수탁자에게 완전히 이전되고, 위탁자와의 내부관계에 있어서 소유권이 위탁자에게 유보되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대법원 1991. 8. 13. 선고 91다12608 판결). 그러나 실제 신탁 실무에서는 수탁자가 위탁자에게 임대권한을 부여하는 사례가 많습니다. 신탁계약에 ‘임대권한을 위탁자에게 부여한다’는 취지의 조항을 두는 것입니다.
만약 수탁자로부터 임대권한을 부여받지 못한 위탁자가 임차인과 신탁부동산에 관한 임대차계약을 체결한다면, 그 임차인은 임대권한이 없는 자와 임대차계약을 체결한 것이므로 「주택임대차보호법」이나 「상가건물 임대차보호법」에 따른 보호를 받을 수 없습니다.
수탁자로부터 임대권한을 부여받은 위탁자와 신탁부동산에 관한 임대차계약을 체결하면 어떨까요? 이에 대해 대법원은 최근 중요한 판결을 선고하였습니다(대법원 2022. 2. 17. 선고 2019다300095, 2019다300101 판결, 이하 ‘대상판결’). 대상판결의 사실관계를 시간 순서대로 정리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① A회사는 2007. 6. 4. 오피스텔 162채에 관하여 B신탁회사와 부동산담보신탁계약(이하 ‘이 사건 신탁계약’)을 체결하고 소유권이전등기를 마쳐 줌(A회사가 위탁자, B신탁회사가 수탁자)
② 이 사건 신탁계약에는 아래와 같은 조항이 있었고, 이러한 신탁계약의 내용이 신탁원부에 기재됨
제9조 [신탁부동산의 보전관리 등] ① 위탁자는 신탁부동산을 사실상 계속 점유사용하고, 신탁부동산에 대한 보존ㆍ유지ㆍ수선 등 실질적인 관리행위와 이에 소요되는 일체의 비용을 부담한다.
② 위탁자는 수탁자의 사전 승낙이 없는 경우에는 신탁부동산에 대하여 임대차, 저당권설정, 전세권설정 등 소유권을 제한하는 행위나 신탁부동산의 현상을 변경하는 등의 방법으로 가치를 저감하는 행위를 하지 못한다.
제10조 [임대차 등] ③ 신탁기간 중 임대차계약기간의 만료 또는 임대차계약의 해지 등으로 인하여 임대차계약을 갱신하거나 새로운 임대차계약을 체결하는 경우 위탁자는 제9조 제2항의 규정에 따라 수탁자의 사전 승낙을 받아 자신의 명의로 계약을 체결하여야 한다.
④ 제3항의 규정에 불구하고 위탁자가 임의로 체결한 임대차계약은 수탁자에게 그 효력을 주장할 수 없으며, 그로 인하여 수탁자에게 손해가 발생하는 경우 위탁자가 배상하여야 한다.
⑤ 제3항의 규정에 의하여 위탁자 명의로 새로운 임대차계약을 체결하는 경우로서 임차인의 요구가 있는 경우에는 임대인란에 위탁자와 수탁자가 공동날인할 수 있으며 (이하 생략)
③ C는 2007. 7. 3. A회사와 오피스텔(이하 ‘이 사건 오피스텔’)에 관한 임대차계약을 체결한 후, 이 사건 오피스텔을 인도받아 거주하면서 주민등록을 이전하고 임대차계약서에 확정일자를 받았으며, 계약을 연장하면서 계속 거주함
④ B신탁회사는 이 사건 오피스텔을 포함한 신탁부동산을 공매하였고, D가 2016. 8. 31. 위 공매절차에서 B신탁회사로부터 이 사건 오피스텔을 매수하여 소유권이전등기를 마침
⑤ D는 C를 상대로 이 사건 오피스텔의 명도 및 차임 상당의 부당이득반환을 청구함(원고: D / 피고: C)
⑥ 제1심은 ‘A회사가 B신탁회사의 사전 동의를 받아 이 사건 오피스텔에 관한 임대차계약을 체결하였으므로 임대차계약은 B신탁회사에 대해서도 효력이 있고, D는 B신탁회사로부터 이 사건 오피스텔을 매수하였으므로 임대차계약을 승계한다’고 판단하면서 D의 청구를 기각함
⑦ D가 항소하였는데, 항소심 계속 중이던 2019. 2. 14. 이 사건 오피스텔의 시정장치를 교체하는 방법으로 이 사건 오피스텔의 점유를 취득하였고, 이에 따라 명도청구를 취하함
⑧ 한편, C는 항소심에서 임대차보증금의 반환을 청구하는 반소를 제기함
위와 같은 사실관계 하에서 제2심은 D의 청구와 C의 반소청구를 모두 기각하였습니다. 제2심판결에 대해 C만 상고하였고, 대법원은 C의 상고를 기각하였습니다. 대법원의 판단은 아래와 같았습니다.
신탁법은 신탁재산의 독립성을 제3자에게도 대항할 수 있도록 신탁재산의 공시에 관한 독자적인 규정을 두고 있다. 구 신탁법(2011. 7. 25. 법률 제10924호로 전부개정되기 전의 것) 제3조 제1항은 “등기 또는 등록하여야 할 재산권에 관하여는 신탁은 그 등기 또는 등록을 함으로써 제3자에게 대항할 수 있다.”라고 정하고 있고, 구 부동산등기법(2007. 5. 17. 법률 제8435호로 개정되기 전의 것) 제123조, 제124조는 신탁의 등기를 신청하는 경우에는 ① 위탁자, 수탁자 및 수익자 등의 성명, 주소, ② 신탁의 목적, ③ 신탁재산의 관리 방법, ④ 신탁종료의 사유, ⑤ 기타 신탁의 조항을 기재한 서면을 그 신청서에 첨부하도록 하고 있고, 그 서면을 신탁원부로 보며 다시 신탁원부를 등기부의 일부로 보고 그 기재를 등기로 본다고 정하고 있다. 따라서 신탁계약의 내용이 신탁등기의 일부로 인정되는 신탁원부에 기재된 경우에는 이로써 제3자에게 대항할 수 있다. (중략)
이 사건 신탁계약에서 수탁자의 사전 승낙 아래 위탁자 명의로 신탁부동산을 임대하도록 약정하였으므로 임대차보증금 반환채무는 위탁자에게 있다고 보아야 하고, 이러한 약정이 신탁원부에 기재되었으므로 임차인에게도 대항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사건 오피스텔에 관한 부동산담보신탁 이후에 위탁자인 A회사로부터 이를 임차한 피고(C)는 임대인인 A회사를 상대로 임대차보증금의 반환을 구할 수 있을 뿐 수탁자인 B신탁회사를 상대로 임대차보증금의 반환을 구할 수 없다. 나아가 B신탁회사가 임대차보증금 반환의무를 부담하는 임대인의 지위에 있지 아니한 이상 그로부터 이 사건 오피스텔의 소유권을 취득한 원고(D)가 주택임대차보호법 제3조 제4항에 따라 임대인의 지위를 승계하여 임대차보증금 반환의무를 부담한다고 볼 수도 없다.
대상판결에 대해서는 그동안 적지 않은 수의 평석과 의견이 제시되었습니다. ▲ “「주택임대차보호법」 제3조 제4항에 따라 임차주택의 양수인이 임대인의 지위를 승계하기 위해서는 ‘임차주택의 양도인과 임대인이 동일해야 한다’는 추가적인 요건이 필요하다.”라면서 대상판결의 결론을 지지하는 견해, ▲ “그동안 대법원은 여러 판결을 통해 ‘임대인이 목적물의 소유자가 아니더라도 임차인이 임차권을 소유자에 대해 주장할 수 있는 경우라면 「주택임대차보호법」상 대항력 요건을 갖추어 대항력을 취득하고, 양수인에 대해서도 임차권을 관철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왔는데, 대상판결은 이러한 판결례들과 다른 태도를 취한 것이다.”라면서 대상판결의 결론에 반대하는 견해 등이 제기되었습니다. 대상판결에 대한 여러 논의들을 모두 자세히 소개하기는 어렵고, 본 칼럼에서는 실무상 문제될 수 있다고 생각되는 두 가지 점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신탁등기의 대항력 문제입니다. 대법원은 대상판결에서 “신탁계약의 내용이 신탁등기의 일부로 인정되는 신탁원부에 기재된 경우에는 이로써 제3자에게 대항할 수 있다.”라고 판시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판시는, 신탁계약의 해석과 제3자와의 관계에 대해 곤란한 문제를 발생시킬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계약의 해석은 매우 어렵습니다. 계약을 체결한 당사자들조차 계약의 해석에 대해 다투고, 그로 인해 수많은 분쟁이 발생합니다. 종국적으로는 법원의 판결을 통해 계약의 해석에 관한 판단을 받는 경우가 부지기수입니다. 하물며 계약의 당사자도 아닌 제3자가 신탁원부에 기재된 신탁계약을 읽고 계약 문언의 객관적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이런 점에서, 신탁계약의 내용이 (신탁등기의 일부로 인정되는) 신탁원부에 기재되었다는 이유로 제3자에 대한 대항력을 일반적으로 인정하는 것은 신중해야 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특히 대상판결의 사안에서도, 비록 ‘위탁자(A회사)의 명의로 계약을 체결해야 한다’는 내용이 신탁계약 제10조 제3항에 있어 임차인(C)이 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하더라도, 신탁계약 제10조 제5항에는 ‘임차인의 요구가 있으면 위탁자와 수탁자가 공동날인할 수 있다’는 취지의 조항이 있고, 관점에 따라서는 이 조항이 ‘수탁자의 책임을 인정하는 것’이라는 해석도 제기될 수 있다는 점에서, 대상판결이 신탁등기의 대항력의 범위를 지나치게 넓힌 것은 아닌지 검토해 볼 필요는 있다고 생각됩니다.
둘째, 대상판결에 ‘수탁자(B신탁회사)가 임대인의 지위에 있지 않다’고 서술되어 있어 다소 오해할 수 있지만, 대법원은 ‘수탁자(B신탁회사)와 양수인(D)에게 임대차보증금의 반환의무가 없다’고 판단하였을 뿐, ‘임차인(C)이 수탁자(B신탁회사)와 양수인(D)에게 「주택임대차보호법」상 대항력을 주장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은 아닙니다. 비록 양수인(D)이 상고하지 않아 양수인(D)의 청구에 대한 대법원의 판단은 없었지만, 대상판결의 항소심은 「주택임대차보호법」상 대항력을 인정하면서 양수인(D)의 부당이득반환청구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요컨대, 대상판결의 사안에서 임차인(C)이 위탁자(A회사)로부터 임대차보증금을 반환받을 때까지 이 사건 오피스텔을 점유하였다면, 양수인(D)의 명도 청구에 응하지 않고 계속 거주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법원도서관, 대법원판례해설(제131호), 22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