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말 경부터 일부 의사를 중심으로 낙태반대 운동이 활발합니다. 모든 생명이 고귀하고 그중에 으뜸이 인간의 생명임은 상식입니다. 나아가 장차 인간이 될 생명체라고 할 수 있는 태아의 생명 역시 고귀하게 보호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출생 전 태아의 생명을 출생 후 존재인 인간의 생명과 동일한 정도로 보호할 것인가는 의문입니다. 예를 들어 출산 과정에서 산모의 생명이 위태롭게 된다면 태아의 생명을 포기하고 산모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 불가피합니다. 즉 태아의 보호를 어느 정도 할 것인가는 입법정책과 관련이 있습니다. 현행 형법에서도 낙태죄는 살인죄에 비하여 상당히 가볍게 처벌하고 있습니다. 살인죄(250조 1항)는 사형, 무기 또는 5년 이상 징역에 처하는 반면에 낙태죄(270조 2항)는 3년 이하의 징역에 처합니다.
낙태를 유발하는 행위에는 고의행위뿐 아니라 과실행위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의사가 임신부에 대한 진료를 하는 과정에서 과실을 범하여 낙태가 초래된 경우에 의사를 처벌할 수 있을까요? 현행 형법에는 과실치사죄(266조)나 업무상과실치사죄(268조)는 있지만 과실낙태죄나 업무상과실낙태죄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낙태 자체가 낙태 전 산모의 건강상태에 장해를 초래한 것으로 해석하여 산모를 피해자로 하는 업무상과실치상죄가 성립될 수 있을까요? 결론부터 말하면 불가능합니다. 즉 의료인의 업무상 과실로 낙태가 초래되었다고 하여도 그 의료인을 산모에 대한 과실치상죄로 처벌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민사소송을 제기하여 민사상 손해배상 책임을 부담하게 할 수는 있습니다.
실제 사건에서 임신 32주인 산모가 한밤중에 대학병원 응급실로 찾아와 복통을 호소하였습니다. 산부인과 의사는 소화기 장애로 진단한 내과의사 말만 생각하고 환자를 지속적으로 관찰하지도 않고 태아감시장치나 초음파검사도 실시하지 않았습니다. 산모는 결국 태반조기박리로 인한 낙태를 하게 되었습니다.
대법원은 위 사건에서 현행법상 이들을 처벌할 수 없다는 뜻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피고인들에게 산모에 대한 업무상과실 치상죄를 인정한 하급심 판결은 파기되었습니다. 대법원의 판단 근거는 다음과 같습니다(대법원 2009.7.9. 선고 2009도1025 판결).
첫째, 현행 형법은 사람에 대한 상해 및 과실치상의 죄에 관한 규정과는 별도로 태아를 독립된 행위객체로 하는 낙태죄 관련 규정을 두고 있다. 임신부의 자기낙태행위 및 제3자의 강제낙태행위, 낙태로 인하여 임신부에게 상해 또는 사망에 이르게 한 행위 등에 대하여는 각각 상해죄와 별도로 처벌하도록 하고 있다. 즉 사람에 대한 상해와 낙태는 엄격하게 구별된다.
둘째, 과실낙태행위 및 낙태미수행위에 대하여 따로 처벌규정을 두고 있지 않다. 형법의 대원칙 중 하나는 범죄와 형벌은 법률로 명시되어 있어야만 적용될 수 있다는 죄형법정주의이다. 그러므로 법률에 규정되어 있지 않은 범죄를 비슷한 내용의 규정에서 유추하여 해석하는 것은 허용될 수 없다(유추해석금지).
산모 측은 형사고소와 별도로 손해배상을 구하는 민사소송도 제기하였습니다. 대법원 판결이 선고된 이후 진행된 민사소송에서는 재판부의 조정권고를 받아들여 사건은 원만하게 마무리되었습니다. 검사와 하급심은 피고인들의 과실로 피해자로 하여금 뱃속에 있던 32주 상태의 태아가 태반조기박리로 사망하게 하는 상해를 입게 하였다고 판단하였습니다. 그러나 현행형법의 해석상 낙태 그 자체만으로는 산모에 대한 상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의사의 과실로 인해서 발생한 낙태과정에서 산모에게 과다출혈 등이 원인이 되어 별도의 질병이나 상해가 발생하는 경우에는 산모에 대한 업무상과실치상죄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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