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건설회사 등의 PF사업에 필요한 사업자금의 조달을 위하여 해당 사업에 중대한 이해관계를 가진 제3자(시행사의 관계회사나 해당 PF사업의 시공사 등)가 신용보강을 제공하는 경우가 일반적입니다. 신용보강의 수단은 ‘채무인수약정’과 ‘자금보충약정’으로 대별되며, ‘자금보충약정’의 경우 신용보강의 주체(자금보충자)가 차주 또는 대주에게 자금보충금을 대여하고 후순위로 상환받는 구조의 ‘대여형 자금보충약정’이 많이 이용되어 왔습니다.
대주가 자금보충의 상대방이 되는 구조의 경우, 통상 대주는 SPC 형태로 설립되고 기업어음, 전자단기사채 등의 발행을 통해 대여자금을 조달하여 차주에게 대출을 제공하게 되는데, 일정한 자금보충 사유가 발생하면 자금보충자가 대주에게 자금보충금을 대여하며, 대주는 차주로부터 대여금을 전액 상환받거나 대주가 자금 조달을 위해 발행한 기업어음 등의 채무를 전부 변제한 이후에 해당 자금보충금을 자금보충자에게 상환하는 내용의 자금보충약정이 체결됩니다. 이처럼 대주가 자금보충금 상환의무를 부담하는 구조를 취하기는 하지만, 대주는 차주에 대한 대출금채권 및 그에 대한 담보 이외에는 별도의 책임재산을 보유하지 않는 SPC이고, 또한 상환의 조건 또는 기한이 위와 같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해당 PF사업에서 발생하는 현금흐름 이외에는 자금보충금 상환자금의 재원이 별도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대여형 자금보충약정에 따른 자금보충자의 채무는 차주를 주채무자로 하는 ‘보증’과 같은 기능을 수행하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고, 실무상으로도 그렇게 취급되어 왔습니다.
이러한 연유로 자금보충자에 대해 회생절차가 개시될 경우 대주가 갖는 자금보충금 채권에 관해서는 “해당 자금보충약정이 무상행위에 해당하여 부인권 행사의 대상이 될 수 있는지”가 주로 다투어져 왔고, 회생법원은 대체로 전체 PF사업 구조 및 자금보충자의 이해관계를 고려하여 자금보충약정이 무상행위에 해당하지 않거나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상당성 요건을 인정하여 부인권 행사가 허용되지 않는다고 판단해 왔습니다(서울중앙지방법원 2014. 6. 30.자 2014회확791 결정 등 참조).
그런데 최근 법원은 대여형 자금보충약정의 형식에 착목하여 위 약정을 ‘후순위 상환조건부 금전소비대차(대여)계약’으로 파악하고, 「채무자 회생 및 파산에 관한 법률」(이하 ‘채무자회생법’) 제119조가 정한 ‘쌍방 미이행 쌍무계약’으로서 관리인이 이행 또는 해제(지)를 선택할 수 있다는 판단을 내놓고 있습니다(서울고등법원 2015. 6. 19. 선고 2014나47513 판결, 서울고등법원 2015. 11. 13. 선고 2015나2030402 판결, 이하 ‘대상 판결’). 이 글에서는 대상 판결의 요지와 그 의미, 거래계에 미치는 영향 등에 관해 간략히 살펴보고자 합니다.
2. 대상 판결의 요지와 의미
가. 대상 판결의 요지
대상 판결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대여형 자금보충약정이 채무자회생법 제119조의 적용을 받는 ‘쌍무계약’에 해당한다고 판단하였습니다.
(1) 자금보충약정에 따르면, 자금보충자가 대주에게 대출원리금 잔액 상당을 보충해 주면 그와 동시에 대주는 자금보충자에 대하여 그 보충액 및 약정이자 상당의 채무를 부담하게 되는 것이므로(다만, 자금보충자는 기업어음 소지인 등 대주에 대한 다른 채권자들에 비하여 후순위로 대주로부터 변제받게 되는 제한이 있을 뿐이다), 이는 법률행위의 형식이나 실질 면에서 모두 ‘대여(금전소비대차)’로서의 요건 및 성질을 갖추고 있다.
따라서 자금보충약정은 ‘후순위 상환조건부 금전소비대차(대여)계약’에 해당한다고 봄이 상당하고, ‘보증계약’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렵다.
(2) 무이자 소비대차계약은 편무계약이지만, 이자부 소비대차의 경우에는 대주가 부담하는 목적물의 소유권을 차주에게 이전하여야 할 채무와 차주가 부담하는 이자지급 의무가 서로 대가적 의미를 가지고 그 성립ㆍ이행ㆍ존속상 법률적ㆍ경제적으로 상호의존적인 견련성을 가지고 있어서 서로 담보로서 기능한다고 볼 수 있으므로 쌍무계약에 해당한다. 따라서 이자부 금전소비대차에 해당하는 자금보충약정은 채무자회생법 제119조 제1항에서 정한 쌍무계약에 해당한다고 봄이 상당하다.
(3) 대주는 자금보충자에게 자금보충약정에 따른 자금보충의무를 이행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자금보충자가 이에 응하지 아니하였고, 대주도 자금보충자에게 이자를 지급한 바 없으므로, 자금보충자의 자금보충의무와 대주의 이자지급 의무는 자금보충자에 대한 회생절차개시 당시 그 전부가 이행되지 아니한 상태였다고 할 것이다.
(4) 결국 자금보충약정은 채무자회생법 제119조 제1항에서 정한 ‘쌍방 미이행 쌍무계약’에 해당한다.
나. 대상 판결의 의미
대상 판결과 같이 대여형 자금보충약정을 채무자회생법 제119조 제1항이 정한 ‘쌍방 미이행 쌍무계약’으로 보게 되면, 회생절차가 개시된 자금보충자의 관리인은 해당 자금보충약정의 이행 또는 해제(지)를 선택할 수 있게 됩니다. 그동안 거래계에서는 자금보충약정이 보증 유사의 계약으로 이해되어 왔기 때문에, 자금보충자의 관리인은 자금보충약정이 무상행위에 해당한다는 이유로 부인권을 행사하는 경우는 있었으나, 채무자회생법 제119조 제1항에 따른 해제(지)권을 행사하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대상 판결의 사안에서도 위와 같은 해제(지)권이 행사되지 않았으며, 따라서 자금보충자의 관리인은 자금보충약정의 이행을 선택한 것으로 간주되어, 대주의 자금보충금 채권은 채무자회생법 제179조 제1항 제7호에 따라 ‘공익채권’에 해당한다고 판단되었습니다.만약 대상 판결의 법리가 확립될 경우, 자금보충자의 관리인은 앞으로 대여형 자금보충약정에 대해 당연히 해제(지)권을 행사하게 될 것이며, 그 경우 대주는 채무자회생법 제121조 제1항에 따라 자금보충약정의 해제(지)로 인한 손해배상청구권을 회생채권으로 행사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이때 과연 대주가 자금보충약정 해제(지)로 인해 어떠한 손해를 입었다고 볼 수 있는지가 문제가 되는데, 대상 판결의 논리를 일관할 경우 대주는 비록 후순위이기는 하지만 자금보충금을 자금보충자에게 상환할 의무를 부담하기 때문에, 결국 대주가 입는 손해는 없다는 결론으로 이어질 수 있게 됩니다.
결국 대상 판결에 따를 경우 대여형 자금보충약정은 자금보충자에 대해 회생절차가 개시될 경우 신용보강 장치로서의 기능을 수행할 수 없게 될 가능성이 높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3. 대상 판결에 대한 평가
대상 판결은 대여형 자금보충약정의 형식을 중시하여 위 약정을 쌍무계약으로 보았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결론은 대여형 자금보충약정에 따른 계약관계의 실질을 외면하고, 채무자회생법상 쌍무계약의 법리를 오해하였으며, 당사자들의 진정한 의사를 도외시한 판단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가. 자금보충약정의 실질
대개의 경우 대주는 PF사업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설립된 SPC로서 자금조달의 매개체(vehicle)에 불과한 경우가 많습니다. 대주SPC는 근소한 자본금으로 설립되고, 설립목적 자체가 “PF사업의 시행자인 차주에게 대출을 실행하여 취득하는 대출채권의 관리, 운용, 처분에 관한 업무”로 제한됩니다. 대주SPC의 자산은 차주에 대한 대출채권밖에 없고, 부채는 위 대출금을 조달하기 위해 부담한 기업어음, 전자단기사채 원리금 등 반환의무밖에 없습니다.
한편, 대여형 자금보충약정에서 대주는 차주로부터 대출원리금을 전액 상환받거나 또는 대여자금 조달을 위해 부담한 대주의 채무가 완제될 것을 조건으로 하여 자금보충자에게 자금보충금을 상환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차주가 대출채무를 전부 상환하지 않는 이상 자금보충자가 대주에게 자금보충금의 반환을 청구할 수 없고, 대주에게는 차주에 대한 대출채권 외에 다른 재산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자금보충자는 차주가 대주에게 변제하는 자금 외에 대주의 다른 책임재산으로부터 자금보충금 상환청구권의 만족을 얻을 수도 없습니다.
이러한 자금조달 구조에서 확인되듯이, 자금보충자의 대주에 대한 자금보충금 상환청구권은 대주의 자력을 기초로 한 현실적인 권리가 아니며, 해당 PF사업과 관련하여 발생하는 수익 등이 대주라는 매개체(vehicle)를 거쳐 자금보충자에게로 흘러들어 가는 구조의 ‘법률적 외형’에 불과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구조에서 자금보충자가 대주에게 갖는 자금보충금 상환청구권은 보증계약의 보증인이 주채무자에게 구상권을 행사하여 보증채무 이행자금을 회수하는 것과 그 실질이 다르지 않습니다.
따라서 자금보충약정의 실질적 기능, 당사자들의 의사를 중시할 경우 대여형 자금보충약정은 그 형식에도 불구하고 ‘보증계약’에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나. 자금보충약정의 쌍무계약성
(1) 채무자회생법이 쌍방 미이행 쌍무계약의 경우 관리인에게 해제ㆍ해지 또는 이행에 관한 선택권을 부여하는 한편, 관리인이 해제ㆍ해지/이행을 선택한 각 경우별로 상대방을 보호하기 위한 규정을 두고 있는 것은, 쌍무계약의 경우 쌍방의 권리가 서로 담보로서 기능한다는 점을 고려하여 회생절차의 원활한 이행을 위해 관리인의 선택권을 인정하는 대신 양 당사자 사이에 형평을 유지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대법원 2000. 4. 11. 선고 99다60559 판결 등 참조).
(2) 대상 판결은 자금보충자가 대주에 대해 부담하는 자금보충금 지급의무와 대주의 자금보충자에 대한 자금보충금 이자지급 의무가 상호 대등한 대가관계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위 가.항에서 본 바와 같이 대주의 이자지급 의무는 대주의 독자적인 책임재산을 재원으로 하여 이행될 것이 기대된 채무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차주가 대출채무를 완제하지 않는 이상 자금보충자는 이자는 물론이고 자금보충금 원금의 상환조차 대주에게 청구할 수 없고, 대주는 자본금이 지극히 근소하고 다른 고유재산도 가지고 있지 않은 SPC에 불과하여 자금보충금에 대한 이자는 어차피 PF사업에서 발생하는 수익을 기초로 차주가 대주에게 변제하는 자금을 재원으로 하여 지급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구조를 전제로 체결된 자금보충약정의 경우, 자금보충자가 “대주로부터 자금보충금에 대한 이자를 수취할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거나 “위 이자가 자금보충의무와 대등한 대가관계에 있는 반대급부”라고 보는 것은 무리입니다.
(3) 자금보충자의 자금보충금 상환청구권(이자 포함)은 차주가 대주에게 대출원리금을 전액 상환할 것을 조건으로 발생합니다. 즉, 자금보충자는 대주에게 자금보충금을 전액 지급하더라도 차주가 대주에 대한 대출원리금을 전액 변제하지 않는 이상 대주에게 자금보충금 상환을 구할 수 없고, 이자를 달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한편, 차주가 PF대출원리금 전액을 상환하게 되면, 대주는 그 자금을 재원으로 하여 자금보충자에게 자금보충금 원리금 상환하게 될 것인데, 이 경우 ‘자금보충금에 대한 이자의 지급’은 차주가 PF대출원리금 전액을 상환한 데 따른 당연한 결과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자금보충금에 대한 이자’라는 급부는 “대주가 자금보충약정의 대가로 자금보충자에게 이행해야 할 의무”로서의 독자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기 어려우며, 근본적으로 양자 사이에 채무자회생법 제119조가 규율하고자 하는 ‘쌍무성’이 있다고 볼 수 있는지에 관해 의문이 있습니다.
다. 당사자들의 의사
자금보충약정의 관련 당사자들은 모두 위 약정의 실질을 보증계약이라고 이해하고, 그러한 이해에 바탕하여 행동해 왔습니다. 회생채권 조사절차에서도 자금보충자의 관리인은 대주의 자금보충금 채권을 회생채권 목록에 자발적으로 등재하고, 해당 약정이 회생절차개시일 이전 6개월 이내에 체결된 경우에만 부인권을 행사하였을 뿐,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모두 회생채권으로 시인하였습니다. 회생계획에서도 자금보충금 채권은 ‘보증채권’에 준하여 변제계획이 수립되어 이행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자금보충약정은 자금보충 사유가 발생할 경우 자금보충인이 확정적으로 잔존 대출원리금 상당의 자금을 보충해 줄 의무를 부담함을 전제로 체결되었는데, 과연 이러한 계약상 의무가 ‘쌍방 미이행 쌍무계약’이라는 틀 안에 들어와 관리인이 임의로 해제(지)를 선택할 수 있다고 볼 수 있는지 의문입니다.
4. 결론
대상 판결이 상고심에서도 그대로 유지ㆍ확정될지는 지켜볼 일입니다. 법원의 판단이 존중되어야 함은 당연하지만, 당사자들의 의사를 도외시하고 약정의 형식만을 중시하여 어느 누구도 의도하지 않은 법률효과를 선언하는 것이 과연 사법기능의 바람직한 모습인지에 관해서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약 대상 판결의 법리가 확립될 경우, 거래계에서 더 이상 ‘대여형 자금보충약정’을 신용보강의 수단으로 이용할 수는 없게 될 것이며, 이러한 점에서 대상 판결의 추이를 지켜볼 필요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