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G 시대, 자본주의 대전환
코로나19라는 유례없는 사태를 맞으며 세계는 ESG로 뜨겁습니다. 환경, 사회, 지배구조의 약자인 ESG는 투자와 금융에서 시작돼 시장과 기업을 조금씩 바꾸고 있습니다. ESG와 같은 비(非)재무 요소가 기업가치 및 지속가능성에 결정적이라는 인식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ESG의 배경으로는 기후위기 등이 거론되지만 무엇보다도 이해관계자 자본주의의 대두가 중요합니다.
2019년 미국의 대기업 협의체인 비즈니스 라운드 테이블(BRT)은 ‘기업의 목적에 관한 선언’을 발표했습니다. 주주를 위한 눈앞의 이윤만 추구하지 않고 근로자와 고객, 협력업체, 지역사회 등 이해관계자를 고려하는 근본적 책무를 이행한다는 내용입니다. 이를 두고 주주 자본주의의 종식, 포용적 자본주의로의 전환이라는 보도가 이어졌습니다. 다보스 세계경제포럼(WEF)에서도 비즈니스가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를 전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논의하였습니다. 운용자산 규모가 1경원에 가까운(2020년 12월 말 기준 8.68조 달러) 미국 자산운용사 블랙록은 “이해관계자와의 긴밀한 관계가 수익률 향상을 견인한다”며 기업에 이해관계자를 중심에 둘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자본주의의 대전환을 보고 있습니다.
ESG 중 노동 이슈
노동은 ESG 중 사회(Social) 영역의 중요 이슈입니다. 국제적 ESG 공시기준인 GRI 기준
1) 등에 따르면 기업은 노사관계와 관련해 아래의 사항을 보고해야 합니다. 안전과 보건, 인권이라는 항목을 제외하고도 노동 관련 이슈는 이렇게 광범위합니다.
ESG와 노사관계 변화
ESG는 근로자를 보는 관점을 바꾸고 있습니다. 자본주의는 본래 자본 중심, 주주 중심의 기업을 전제로 합니다. 자본은 노동을 고용해서 생산시설과 자원을 투입한 뒤 부가가치를 만들어냅니다. 여기서 노동은 하나의 자원입니다. 그런데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로 전환하면서 노사관계에 커다란 변화가 요구되고 있습니다. 근로자가 단순한 피용인이 아니라 중요한 이해관계자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2019년 BRT 성명에서도 “직원들에게 투자함(공정한 보상과 중요한 혜택 제공, 다양성과 포용성, 존엄과 존중을 촉진)”이라는 부분이 “주주를 위한 장기적 가치를 창출함”보다 훨씬 앞서 강조되고 있습니다. 근로자에게 투자하는 것(인적 자본), 근로자에게 공정한 보상과 혜택을 제공하는 것(근로조건), 근로자를 존엄한 존재로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인권경영), 근로자의 의견을 경영에 반영하는 것(경영관여) 등이 중요한 문제로 되고 있습니다.
인적 자본(Human Capital)의 중요성
‘인적 자본’이라는 개념이 다시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2) 근로자를 인적 자원(Human Resource)을 넘어 인적 자본(Human Capital)으로 보는 것입니다. 물적 자본(Capital) 못지않게 인적 자본(Labour)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비용’이 아니라 ‘자본’입니다. ESG 경영의 중심은 ‘사람’입니다. 개인의 발전이 기업의 성장을 뒷받침합니다. 사람에 투자하라. 이런 말들이 새삼 강조되고 있습니다.
하버드 로스쿨 기업지배구조 포럼이 2020년 3월경 발표한 ‘글로벌 기관투자자 조사결과’에 따르면 인적 자본 관리는 기후위기에 이어 두 번째로 중요한 ESG 과제로 인식되고 있습니다(응답자의 91%가 기후위기, 64%가 인적 자본관리를 중요한 ESG 과제로 꼽았습니다). 인적 자본이 기업의 성과와 밀접한 관련이 있고, 근로자 만족도가 높은 회사가 수익률도 좋고 주가도 더 높게 형성된다는 연구결과도 나오고 있습니다.
2020년 3월경 300개 이상의 세계적 기관투자자들이 함께 코로나19 긴급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코로나19 위기를 이유로 직원들을 해고하지 말 것, 직원들의 건강과 안전을 위해 유급휴가를 줄 것, 직원 자녀의 돌봄을 지원할 것, 해고 노동자에 대한 건강보험을 지원할 것 등을 기업들에게 권고했습니다. “불황은 짧고 인재는 영원하다”는 말처럼 인적 자본이 중요해진 것입니다.
한국에서도 다양한 사례가 나오고 있습니다. 최근 SK그룹은 ‘mySUNI’라는 교육 플랫폼을 만들었습니다. 급변하는 경영환경에서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해서는 구성원의 역량을 키워야 한다는 배경에서입니다. 사장급의 최고학습책임자(CLO, Chief Learning Officer)가 임명됐습니다. 커리큘럼도 인공지능, 디지털 전환, 글로벌과 같은 현안뿐 아니라 행복, 사회적 가치 등 다양합니다. 놀라운 것은 직원들은 연간 근무시간의 10%가량인 200시간의 학습시간을 근무시간으로 인정받는다는 것입니다.
LG전자는 최근 스마트폰 사업부를 철수하기로 했습니다. 적자사업부를 접을 때에 정리해고를 하던 과거와는 달리 LG전자는 해당 사업본부 직원들의 고용을 유지하고, 해당 직원들의 직무역량 등을 고려해 재배치할 계획이라고 밝혔습니다.
근로자의 경영관여(Employee Engagement)3)
기업 지배구조에서 근로자의 목소리를 강화하는 것은 ESG 시대의 중요한 거버넌스 이슈입니다. 종전의 논의인 근로자 경영참여(Employee Participation)를 ESG 맥락에서 재조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근로자 경영참여는 독일의 공동결정제도와 같이 근로자가 자본가와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기업을 함께 경영하는 사례도 있고, 노동이사(노동조합 추천 이사) 제도와 같이 이사회에서 근로자를 대표하는 사람을 지명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반면 전통적 노조가 아닌 사회적 파트너십(Social Partnership)을 통해 사용자와 근로자 간의 경영협의가 이루어지는 경우, 근로자들이 이사회가 아닌 주주총회를 통해 경영관여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우리사주제도). 전통적인 방식인 노동조합에 의한 단체협약도 넓게 보면 경영참여의 한 형태로 볼 수 있습니다.
ESG는 근로자의 경영관여(Employee Engagement)라는 개념으로 이해관계자의 하나인 근로자의 목소리를 듣는 것, 근로자들이 경영에 관여하는 것을 중요시합니다. 다만 ESG 투자자들은 하나의 방식이 아니라 다양한 경영관여 방식이 있음을 인정합니다. 실질적으로는 경영을 할 때 근로자의 의견을 얼마나 수렴하는지, 민주적 노사관계를 가지고 있는지를 중요하게 고려합니다.
다양성, 평등과 포용(DE&I : Diversity, Equity and Inclusion)
다양성, 평등과 포용은 서구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ESG 이슈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미투(#MeToo)와 Black Lives Matter(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 운동 이후 기업의 젠더 또는 인종 문제가 부각되었기 때문입니다. 조직 내 다양성을 확보하겠다는 기업들의 선언이 줄을 이었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2025년까지 흑인의 임원 비율을 2배로 늘리겠다고 선언했고, 골드만삭스는 ‘인종 형평성 개선위원회’를 조직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구글도 2025년까지 소수인종 임원 비율을 30% 이상 늘리겠다고 발표했습니다. 투자자들도 이사회에 다양성을 요구하고 나섰습니다. 나스닥은 다양성 이사 제도를 요구하여 여성 정체성을 가진 이사 1명과 소수자(인종, 장애, 성소수자 등)를 대표하는 이사 1명을 선임하지 않으면 나스닥에서 퇴출하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여성 이슈가 중요하게 등장하고 있습니다. 한국 기업의 여성 비율, 여성 임원비율은 OECD 국가 중에서 가장 낮은 편입니다. 이런 문제의식을 배경으로 자산총액 2조 이상인 주권상장법인에 대하여 여성이사 1명을 의무화하는 법률이 만들어졌습니다. 여성이사 1명을 선임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용이하지만 직원 중 여성 비율, 특히 임원 중 여성 비율을 하루아침에 높이는 것은 어렵습니다. 시장은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합니다. 세계의 투자자들은 Women Index를 만들어 투자심사에서 활용하고 있습니다. 여성 고용비율, 성별 근속연수, 여성 임원비율 등을 토대로 기업이 여성을 얼마나 잘 활용하는지 살펴보고 ‘여성 친화기업’에 투자하고 있는 것입니다.
ESG를 통한 노사관계 혁신
우리나라의 노사관계는 지난 시기 많은 발전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부족한 부분도 많습니다. 아직 많은 기업들이 결사의 자유, 단체교섭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2019 전국 노동조합 조직현황을 보면 노동조합 조직률은 12.5%입니다. 300명 이상 사업장도 45%가량은 노동조합이 없습니다). 근로자를 이해관계자로 취급하는 기업문화도 정립되어 있지 않습니다. 민주적 노사관계가 형성되지 않은 사업장도 많습니다. 일부 기업에서는 대립적 노사관계로 인하여 노사 간 협력은 요원합니다. 노사관계가 눈앞의 이익에 집중해서 지속가능 발전에 장애물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비정규직, 기간제 근로자 그 밖의 사회적 소수자의 문제는 노사관계에서 외면되고 있습니다.
인권경영은 확산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사기업 중 외부기관을 통하여 인권영향평가를 하고 인권보고서를 공개하는 경우를 찾기는 어렵습니다. 다양성 및 포용성도 아직 걸음마 단계입니다. 여성 비율은 매우 낮고 여성 임원비율은 더욱 낮습니다. 이런 수치는 일과 가정의 양립이 쉽지 않은 환경을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장애인, 경력단절 여성, 외국인, 고령자를 비롯한 사회적 소수자의 고용은 여전히 외면되고 있습니다.
ESG의 흐름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단초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근로자를 이해관계자로 보아 그 목소리를 경청하고, 근로조건을 개선하며, 역량개발을 위해 투자하는 흐름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인권이 기업의 필수 요소라는 인식도 확대되고 있습니다. 다양성 및 포용성을 존중하는 문화도 생기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러쉬코리아는 비혼자를 위한 복지제도를 시행하고, 구글코리아는 게이글러스(Gayglers)라는 성소수자 지지모임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ESG가 한국의 노사관계 또는 기업문화를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해봅니다.
※ 본 칼럼은 월간노동법률 2021년 6월호에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