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음지】- 2000년 겨울호 IMF 이후 많은 건설회사들이 곤욕을 치르고 있다. 특히 공사를 마치고도 공사대금을 받지 못하는 회사의 억울함은 말로 다할 수 없다. 그리고 그 중에도 하도급공사를 주로 하는 전문건설회사들의 어려움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대개 중소기업이라 자금조달이 쉽지 않은 상황에서, 그야말로 엎친 데 덮친 격이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을 위해 만들어진 제도인 공제조합의 하도급대금지급보증제도는 별 구실을 못하고 있다. 건설공제조합이 하도급대금보증약관을 이유로 보증금의 지급을 거절하고 있기 때문이다. 건설공제조합의 보증서를 믿고 모든 것을 다해 공사를 마쳤지만, 공제조합에 보증금의 지급을 청구하면 냉정하기 짝이 없는 공문을 받기 일쑤다. “하도급대금지급보증약관 몇 조에 따라 귀사에게는 보증금을 지급할 수 없습니다.” 사실 보증서를 교부받았을 때 약관을 자세히 읽어보고 하도급공사를 하는 회사가 몇이나 될까? 요즘 약관이 많이 이용되고 있지만, 약관을 꼼꼼히 읽어보고 계약을 체결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은행으로부터 대출을 받을 때에도, 보험에 가입할 때에도, 자동차를 구입할 때에도, 심지어는 놀이공원의 입장권 뒤에도 약관이라는 것이 있지만, 때론 약관이 있다는 것조차 잊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이다. 변호사조차도 약관을 읽어보고 계약을 하는 일은 없으니 말이다. 그래서 그놈의(?) 약관 때문에 우린 뒤통수를 맞는 경우가 허다하다. 물론 계약은 지켜져야 하고, 계약내용을 이루는 약관도 당사자 사이에 구속력이 있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약관은 계약의 어느 당사자가 일방적으로 미리 만들어놓은 것이고, 서로 협상을 거쳐 만들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공정하지 못하거나 고객에게 매우 불리한 경우가 많다. 이런 불공정한 약관도 법적 구속력이 있다고 할 수 있을까? 결론은 그렇지 않다. 즉 불공정한 약관은 법적으로는 무효이다. “약관의 규제에 관한 법률”에는 신의성실의 원칙에 반하여 공정을 잃은 약관조항은 무효라고 선언하고 있다. 그래서 고객에 대하여 부당하게 불리한 약관조항은 무효로 된다. 그리고 고객이 예상하기 어려운 약관조항, 계약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을 정도로 고객의 본질적 권리를 제한하는 약관조항도 무효이다. 최근 공정거래위원회는 건설공제조합의 하도급대금지급보증약관에 대해 두 번에 걸쳐 시정명령을 내렸다. 우선 1998년 6월 22일 공정거래위원회는 하도급대금지급보증약관 조항 중 다음과 같은 조항에 대하여 삭제 또는 수정을 명하였다. 첫째, 하도급대금을 어음으로 받았을 때에는 그 어음의 만기일이 보증기간에 있지 아니하면 공제조합이 보증채무를 이행하지 아니한다는 조항. 둘째, 당초의 하도급대금지급기일을 다른 어음을 발행ㆍ배서하는 방법으로 연장한 경우에는 공제조합이 보증채무를 이행하지 아니한다는 조항. 셋째, 보증서에 기재된 내용이 하도급인과 하수급인 사이에 맺어진 주계약상의 실제 계약금액 또는 대금지급주기 등과 차이가 있는 경우에는 보증서는 효력이 없다는 조항. 넷째, 보증채권자가 공제조합의 조사 및 자료제출요구에 정당한 사유 없이 협조하지 아니한 경우에는 보증금을 지급하지 아니한다는 조항. 그리고 1999년 5월 4일에는 “발주자와 하도급인 사이의 원도급계약이 해지되거나 보증시공의 조치가 있어야 보증책임을 진다”는 조항 등이 다시 불공정약관조항이라는 결정을 받았다. 공정거래위원회의 시정명령에 따라 건설공제조합은 약관의 해당조항을 수정하거나 삭제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보증금을 청구한 회사들은 아직도 보증금을 지급받지 못하고 있다. 시정명령은 사업자로 하여금 약관을 고치도록 명령한 것에 불과하므로, 시정명령만으로 건설공제조합이 여전히 보증금의 지급을 거절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즉, 공정거래위원회의 시정명령은 불공정약관으로 이미 피해를 본 회사들에겐 궁극적인 해결방법이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보증금을 받고자 하는 회사들은 법원에 소송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 최근 필자는 건설공제조합을 상대로 하도급대금지급보증금을 청구하는 몇 건의 소송을 진행하고 있다. 위 소송은 1심에서 모두 승소하였으나, 건설공제조합이 항소하여 지금 항소심 재판진행 중이다. 그 중 하얀창산업(주)이 제기한 보증금청구소송에서는 “선금, 기성금을 수령한 때에는 10일 이내에 통지하지 아니하면 보증책임을 지지 아니한다는 약관조항은 무효이고, 비록 하수급인이 해당공종의 면허를 소지하지 아니한 채 공사를 수행하였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보증사고의 원인이 되지 아니하였다면 건설공제조합은 보증책임을 이행하여야 한다”는 내용의 판결이 나왔다. 그리고 (주)충전공영개발과 (주)창조건설이 제기한 소송에서는 “하도급대금으로 교부받은 어음의 만기일이 보증기간에 있지 아니하다는 이유로 공제조합이 보증채무를 이행하지 않는다는 약관조항과 보증서에 기재된 내용과 주계약상의 실제 계약금액 또는 대금지급주기 등과 차이가 있는 경우에는 보증서는 효력이 없다는 약관조항은 모두 무효”라는 판결을 내려졌다. 위 소송들은 하도급대금지급보증금과 관련된 거의 최초의 소송이기 때문에 많은 이해관계자들이 그 결과를 주목하고 있다. 그러나 주의할 것은 위 소송에서 원고인 건설회사들이 승소하여 보증금을 지급받게 된다고 하더라도, 공제조합이 소송을 제기하지 않고 있는 다른 건설회사들에게 임의로 보증금을 지급할 가능성은 매우 적다는 것이다. 판결의 효력은 소송의 당사자 사이에만 미친다는 것을 이유로 건설공제조합은 다른 건설회사들에게는 보증금의 지급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특히 조심할 것은 공제조합에 대하여 가지는 보증금에 관한 권리는 보증기간 만료일로부터 5년간 행사하지 않으면 시효로 인하여 소멸한다는 것이다(건설산업기본법 제67조 제2항). 더욱이 보증사고가 발생하고 장시간이 경과한 뒤에는 소송자료를 얻는 것이 어려워지기 때문에 소송을 수행하는 것이 수월하지 않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사실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던 하도급대금지급보증약관은 전면수정되었으나, 문제는 아직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았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실망할 일은 아니다. 우리는 해결을 위한 실마리를 찾았고, 해결점은 눈 앞에 있다. 임성택 변호사(법무법인 지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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