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신문 2002. 12. 5. 벤처위기론이 오랫동안 언론의 지면을 장식하고 있고, 아직도 위기의 출구를 찾기 위한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불과 2, 3년 전만 해도 국민들을 들뜨게 했던 벤처열풍이 갑자기 식고 벤처에 대한 기대가 우려로 변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서는 각계 전문가들마다 다양한 분석을 내놓고 있다. 전문가들은 해외시장 침체, 수익모델의 부재, 불투명한 경영, 비도덕적 자금운용, 자금시장의 불안정 등을 그 원인으로 들고 있다. 법률가의 한 사람으로서 벤처위기의 원인 중 하나로 견제와 균형의 장치가 제대로 작동되고 있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근대 시민혁명 이후 민주국가들이 자리를 잡아가면서 채택한 주요한 원칙 중 하나가 권력분립원칙이다. 이는 국가권력을 분리하여 각각 별개 기관이 행사토록 하고 서로간 ‘견제와 균형(checks and ballances)’을 유지하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권력은 집중될수록 남용되고 독단에 빠질 위험이 있으므로 이를 견제하여 균형을 맞춰나갈 필요가 있다는 인간사회에 대한 오랜 통찰과 경험에서 나온 원리인 것이다. 견제와 균형의 원리는 국가의 운영뿐만 아니라 벤처기업 또는 벤처기업을 둘러싼 벤처생태계 전반에도 적용될 수도 있다. 회사내부의 기관을 주주총회, 이사회, 대표이사, 감사로 구분하고 있는 것도 견제를 통하여 균형을 이루려는 제도적 장치인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법으로도 주주총회 결의사항, 이사회에서 논의돼야 할 사항, 채권자들의 동의를 얻어야 할 사항, 잠재적 투자자들에게 공시해야 할 사항을 정하고 있다. 예컨대 회사가 새로운 사업으로 영역을 넓히고자 할 때는 대표이사 개인의 판단만이 아니라 이사회의 논의를 거쳐야 하고, 새로운 사업이 영업 양수도와 같이 회사운명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것일 때에는 주주총회 결의를 거치고 채권자들의 동의도 당연히 받아야 한다. 또 그 기업이 코스닥등록 기업이라면 공시도 해야 한다. 이사회가 대표이사의 전횡을 견제했더라면 주주들이 주주총회 등을 통하여 경영전반에 대해 질책했더라면, 벤처캐피털이 투자기업의 자금운용이나 사업확장에 대해 감시를 했더라면, 혹은 임원들이 전문경영인의 입장에서 대주주의 부당한 입김을 차단할 수 있었다면 현재 벤처업계가 맞고 있는 위기를 막거나 최소화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경험적으로 이사회에서 다양한 견해가 논의되는 기업, 주주들의 눈을 의식하는 기업, 적법절차를 염두에 두는 기업들이 오히려 안정적인 성장을 이루어가고 있는 것을 보곤 한다. ‘반대를 위한 반대’가 아닌, 경영진에 대한 적절한 견제는 회사를 거품없는 성장의 반석위에 올려놓을 수 있을 것이다. 벤처기업은 속성 상 모험정신과 신속한 의사결정, 과감한 추진이 필요하고 또 그것이 벤처기업의 원동력임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사회의 논의과정, 주주들의 의견, 채권자들의 입장, 정부의 규제 등을 무시하거나 간과한 모험은 모험이 아니라 독단이거나 무모한 시도일 뿐이다. 기술력 있고 성장 잠재성이 높은 기업이 앞으로만 질주하다가 이해 당사자들간 분쟁, 적법절차에 대한 논란으로 발목이 잡혀있는 것을 보면 안타까울 때가 많다. 진정한 ‘상생(相生)’은 전적으로 위임하는 것보다는 적절한 견제를 통해 균형을 잃지 않도록 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대표이사와 이사회, 주주와 임원, 벤처캐피털과 투자받은 기업, 기업과 정부 모두 자기의 역할에 따라 적절한 견제를 해 나간다면, 비록 조금 더디기는 할지라도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깊은 뿌리를 가진 벤처생태계가 정착될 것으로 믿는다. 김상준 변호사(법무법인 지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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