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다가스카(Madagascar)'라는 영화를 본 적 있는가. 뉴욕 센트럴 파크 동물원에서 탈출한 동물 친구들이 우여곡절 끝에 '마다가스카'라는 섬에 표류하면서 겪는 모험에 관한 이야기이다. 사자와 얼룩말이 주인공인데, 사자는 배가 고파지면서 동물원에서 절친하게 지냈던 얼룩말의 엉덩이를 스테이크로 보기 시작한다. 사자는 친구를 먹잇감으로 생각하는 자신의 '비인간적(?)'인 모습에 너무도 괴로워하면서, 차라리 굶어 죽기로 작정한다. 하지만 만화 영화는 무릇 해피엔딩으로 끝나야 하지 않나. 이 영화도 다르지 않다. 사자는 바다에 지천으로 널려 있는 생선으로 만든 '스시(생선초밥)'가 입맛에 잘 맞는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얼룩말 친구와 다시 행복하게 살게 된다. 이 영화는 미국에서만 2억불이라는 기록적인 흥행수입을 올린다. 나는 지난 여름 미국에 오는 비행기 안에서 이 영화를 보았는데, 영화의 결말에 웃음짓다가 갑자기 졸음이 확 달아나 버렸다. 영화의 밑바닥에 깔린 차별 의식이 너무도 섬뜩했기 때문이다. 얼룩말이나 생선이나 똑같은 동물이다(물론 얼룩말은 포유류이고 생선은 어류이므로 아주 똑 같은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독은 얼룩말을 먹지 못한다는 갈등을 생선을 먹으면 된다는 식으로 풀어버린다. 그리고 관객들은 그러한 결론에 아무런 의심도 품지 않는다. 하지만 생선의 생명이 얼룩말의 생명보다 소중하지 않을 이유가 뭘까. 생선이 얼룩말과 달리 사자와 같은 동물원(미국)에서 살지도 않았고, 사자와 대화(영어)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일까. 미국에서는 낙태의 합법성 문제가 최근 수 년간 아주 심각한 사회적 문제 중 하나이다. 태아도 생명일진대, 하느님이 아닌 인간이 이를 거두어 갈 수는 없다는 것이 부시 대통령을 비롯한 낙태반대론의 견해이다. 지난 2005년 3월말 미국 플로리다의 한 병원 밖에서는 구름 같이 많은 사람들이 몰려 매일같이 촛불시위를 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15년간 식물인간으로 살다가 죽음을 맞이한 테리 시아보(Terry Schiavo)라는 여성에 대한 애도였다. (Terry Schiavo는 생명유지장치가 제거되면서 삶을 마감하였는데, 생명유지장치를 뗄 수 있느냐의 문제를 가지고 3년에 걸친 법정공방이 계속되었다. 부시 대통령은 Terry의 안락사를 허락한 대법원 판결이 내려진 직후 Terry의 생명을 연장시키기 위해 일요일 아침 미국상원의원들을 급히 소집하여 Terry 생명연장에 관한 특별법안을 통과시키기도 하였다.) 이처럼 생명의 소중함에 대한 미국인들의 의식은 아주 각별하다. 반면 같은 시기 쿠바의 관타나모(Guantamo) 기지나 이라크의 아부 그라이브(Abu Graive) 형무소에서는 포로들에 대하여 무자비한 고문과 구타가 계속되고 있었다. 지난 1월 13일 미국은 파키스탄 국경마을을 폭격하여 주민 17명을 사망하게 하기도 하였다. 테러조직 알카에다의 주요 간부 2명이 그곳에 머물고 있다는 첩보에 근거한 것이었다. 폭격 직후의 미국 언론은 "정말 '목표물(target)'이 그곳에 있었는가"에 초점을 맞추었고(이후 위 '목표물'은 현장에 없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파키스탄 주민들의 사망 문제는 전쟁에 수반되는 '불가피한 손해(collateral damage)'로 취급될 뿐이었다. Terry Schaivo나 파키스탄 주민들이나 똑 같은 인간들임에도 어떻게 이렇게 상반된 태도들 보일 수 있는 것일까. 이러한 이중성의 밑바닥에는 마다가스카에서 얼룩말과 생선의 차이가 있지 않나 싶다. 결국 생선은 '타자(남)'일 뿐이고 '친구'가 아니니, 친구 얼룩말을 먹는 데에 따른 딜레마가 타자인 생선을 먹는 데 문제될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이다. 동료 라이언 일병의 생명은 1개 소대 병력을 투입해서라도 구해야 하지만, '남'인 파키스탄 주민이나 이라크 포로들의 생명은, 앞으로 혹시 있을지 모르는 미국인들에 대한 테러를 막는데 도움이 될 수가 있다면, 아무런 가책 없이 희생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의 희생은 인명 '손실'(loss of live)로도 기록되지 않는다. 단지 불가피한 '손해'(collateral damage)일 뿐인 것이다. 이런 이중 기준의 문제는 비단 현대 미국 사회에 국한되는 것은 아닌 듯하다. 한국에서 구타당하는 외국인 노동자 문제를 보거나, 최근 임수경씨 아들의 죽음에 대한 인터넷 이용자들의 끔찍하리만치 가혹한 댓글들을 보고 있노라면, 누가 누구를 나무랄 처지가 아닌 듯하다. 자신의 자식들이었다면 그렇게 구타할 수 있었겠으며, 자신의 딸과 손주였다면 그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 이렇게 이중 기준적인 행동들은 모두 나와 남이 전혀 별개라는 인식에 근거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자신을 외부와 구별하고 외부와 상호작용을 하는 것(신진대사, 즉 먹고 싸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은 생명체를 무생물과 구분 짓는 핵심적인 속성이다. 따라서 외부 혹은 타자에 대한 이러한 구별적 행동은 생명체로서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할 지도 모르겠다. 초원의 사자가 자신의 새끼를 보호하면서 뛰노는 얼룩말을 먹는 것에 무엇이 문제될 게 있는가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다르고자 한다면, '나'와 '남'을 잇는 그 무엇인가를 깨달아야만 하는 것 아닐까. 한 연구에 따르면, 한국인들은 3다리만 건너면 모두 아는 사이이고, 6다리만 건너면 전 세계 인구 중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구타당하는 외국인 노동자는 실제로 내 친구의 가족일 수 있고, 폭격 당하는 TV 속의 외국인은 내 친구의 친구일 수 있다. 내 친구의 가족이 구타당하고 내 친구의 친구가 죽어가는데, 내 친구나 내가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도 다음 번에는 내가 구타당하거나 폭격당하지 말라는 보장이 있을까(냉전시대가 끝난 현재의 국제 사회에서는 그러한 상호 위해(危害)의 가능성이 거의 없어졌다. 누가 미국에게 감히 폭격을 가할 수 있겠는가. 이 점이 탈냉전 시대를 맞아 새로운 국제인권의 개념과 보호를 요구하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이러한 생각을 할 수 있다면 내려치던 몽둥이가 혹시 멈춰질 수 있지 않을까. 김지홍 변호사(법무법인 지평, 미국 Columbia University School of Law LL.M. 유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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