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사람들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일상생활 속에서 무수한 협상(Negotiation)을 수행한다. 물건 값을 깎기 위한 그 흔한 흥정에서부터 국가의 영토나 안보보전을 위한 외교적인 협상까지 그 중요성이나 복잡성은 다르겠지만 자신의 이해관계를 최대한 반영한 합의를 도출하기 위한 노력이라는 측면에서 모든 협상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 변호사의 업무를 여러 가지로 구분해 볼 수 있겠지만, 고객을 대리하여 협상을 수행하는 일을 주된 업무로 한다고 해도 그다지 틀린 답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협상을 일상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변호사는 협상 과정에서 거의 매번 윤리적인 문제로 인해 심리적 갈등을 겪거나, 때로는 이로 인해 난처한 상황에 처하기도 한다. 포커 게임을 할 때에는 좋지 않은 패를 들고서도 bluffing을 통해 판돈을 먹는 사람을 욕하지 않는다. 심지어 손에 들지도 않은 패를 언급하며 배팅을 주도함으로써 기가 죽은 상대방으로부터 승리를 얻어내더라도 '꾼(선수)'이라고 하면서 칭찬하는 게 통례이다. 포커 게임에서는 내 손에 든 패를 공개할 하등의 의무가 없고, 패에 관한 거짓말을 신뢰하는 건 바보짓이라는 일종의 룰이 있기 때문이리라. 이해관계가 첨예한 협상을 진행하다 보면 이러한 bluffing과 거짓말을 다반사로 볼 수 있다. 고객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대변해야 하는 변호사는 때론 진실이 고객의 손실로 연결될 수도 있다는 사실에 거짓말을 해서라도 고객을 대변하고 싶은 유혹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인지 협상의 본질을 설명하면서 "협상에서 negotiator의 역할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상대방을 mislead하는 것이고, negotiator로서의 능력을 인정 받기 위해선 '협잡꾼'이라는 소리를 종종 들을 수 밖에 없다"고 설파하는 사람들도 있다. 거짓말은 사회적으로 환영 받지 못한다지만, 협상이라는 경기장에서 거짓말(bluffing도 상대방을 mislead한다는 측면에서 거짓말로 분류할 수 있다)은 불가피한 것인가? 혹 비난 할 수 있다 할지라도 그에 대한 구제수단은 상대방을 욕하며 협상테이블을 박차고 나오는 것 뿐인가? 협상을 진행하다 보면 아래와 같은 유형의 거짓말을 흔히 접하게 되고, 종종 나 자신도 이런 거짓말에 대한 유혹을 느끼거나 경우에 따라 고객으로부터 (암묵적으로라도) 요구 받기도 한다. 정보의 은닉 내지 비공개 역시 상황에 따라서는 거짓말이 될 수 있지만, 윤리적 협상이 모든 정보의 공개를 요구하는 것은 아니라는 데 대해서는 별다른 이론이 없으므로, 여기서는 논외로 한다. ① 적어도 1억원은 받아야 합니다. 그 이하로는 협상의 여지가 없습니다. ② 당신 아니라도 이 거래를 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어제도 당신네 경쟁기업 실무자가 와서 1억원에 당장 거래하자고 얘기하고 갔습니다. ③ 제게는 1억원 미만의 제안을 수용할 권한이 없습니다. 장담할 순 없지만 본사 담당임원의 승인을 받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 ④ 우릴 못 믿으십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여기 합의되는 대로 지킬 겁니다. 흔히 협상에는 룰이 없으며, 있다손 치더라도 그 위반이 법률적 책임으로까지 연결되지는 않는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적지 않다. 그러나 위 거짓말 중에는 윤리적 문제를 넘어서서 법적 책임까지 야기할 수 있는 종류의 것도 있다. 위 ①은 소위 bottom line, 즉 밑지고는 팔 수 없다는 reservation point에 관한 거짓말이다. 미국의 경우 협상과정에서의 거짓말에 대해 법적 책임을 묻기 위해서는 '중대한 사실에 관한 의식적인 거짓진술 (Fraud occurs when a misrepresentation regarding material facts is made knowingly)'이라는 요건이 필요한데, reservation point는 material하지 아니하므로 이에 대한 법률적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고, American Bar Association이 제정한 Model Rules of Professional Conduct도 이러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사실에 관한 거짓진술이기 보다는 의견의 표명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는 측면에서도 법적 책임을 묻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에 반해 ②는 BATNA(Best Alternative to Negotiated Agreement)에 관한 거짓말인데, 이는 위 법적 책임의 요건을 모두 충족하고 있다고 보아 Fraud의 성립을 인정하고 있다. 굳이 협상을 하지 않더라도 이용 가능한 대체재를 BATNA라고 정의한다면, 좋은 BATNA는 협상과정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하며, 상대방의 양보 내지 굴복을 강요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이런 점에서 BATNA에 대한 거짓말은 material fact에 관한 거짓말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③은 협상당사자의 협상권한(authority)에 관한 거짓말이다. 협상권한에 관한 거짓말은 협상과정에서 가장 흔히 쓰이는 협상전술 중의 하나이다. 상대방의 제안을 쉽게 뿌리칠 수 없는 상황에서 효과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전술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사실에 대한 거짓말로 분류할 수 있겠지만, 어찌 보면 이러한 전술은 상대방의 제안을 수용하기 어렵다는 우회적인 표현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에 material fact로는 보기 어렵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에 대한 명시적인 기준이나 선례는 여기에도 없는 듯 하다. 한편 ④는 협상당사자의 의지(intention) 내지 신뢰성에 관한 거짓말인데, 예를 들어 문제된 covenants 조항이 당해 거래의 성사를 가름하는 핵심적 이슈라면 형법상 사기죄가 문제될 수 있을 것이다. 변제할 의사가 없는 자가 금원을 차용하면 사기죄가 성립하는 것처럼. 그러나 사기죄가 거론될 정도의 협상이라면, 애초부터 협상 상대방을 잘못 정한 것이고, 실제 사기죄의 구성요건을 입증하기가 그리 만만치도 않다는 점에서 협상테이블을 적시에 벗어나는 게 현명한 대처일 것이다. 법적 책임을 논외로 하더라도 거짓말은 다른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우선 윤리위반을 이유로 변호사업계 내부의 자율규제 대상이 될 수 있다. 위 Model Rules 역시 법적 책임에까지 이르지 아니하는 행위라도 징계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명시하고 있다. 이에 반해 대한변호사협회의 변호사윤리규칙은 품위유지와 같은 추상적인 규정 이외에 변호사의 협상과정에서의 부정직을 직접적인 징계사유로 규정하고 있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합의의 원만한 이행에 결정적 장애요소로 작용할 위험이 있다. 제한된 시간과 정보, 협상전반을 지배하는 불확실성 등으로 인해 때론 거짓말을 기초로 한 합의가 성사되기도 하지만 합의의 이행과정에서 그러한 거짓말이 드러난다면 합의의 원만한 이행을 기대할 수 없고, 상대방은 이런 저런 명목으로 합의를 백지화하려고 시도하거나 합의이행을 까다롭게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reputation에 관한 문제를 야기한다. 특히 변호사가 협상과정에서 dirty trick을 쓴 경우 근시안적으로 볼 때 'deal을 성사시켰다'는 칭찬을 들을지도 모르지만, 업계나 시장에서 당해 변호사의 reputation은 적잖게 손상될 것이고 이로 인해 장래 이해관계가 더욱 첨예한 협상을 수행할 때 치명타가 될 수도 있다. 협상은 상대방을 전제로 것이므로, 내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문제가 자연히 해결되지는 않는다. 필요한 정보를 최대한 수집함으로써 있지도 않는 BATNA에 속지 않는 것, 상대방의 협상권한에 관해 미리 묻고 확인해 둠으로써 결정적인 순간에 합의를 잠정적으로 돌리고자 하는 상대방의 시도를 봉쇄하는 것, 상대방이 '나를 믿지 못합니까'라며 신뢰를 얘기할 때 '당신 말을 신뢰하겠다. 그렇다면 당신은 당신 말을 토대로 한 우리의 이러한 제안을 거부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라고 대응하는 등 상대방의 거짓공세에 대응할 효과적이고도 공명정대한 전술을 체득할 필요가 있다. 또한 상대방이 내가 감추고 싶은 진실(예컨대, 나의 bottom line)을 물어 올 때 '그러면 당신의 bottom line은 무엇인가' 되묻거나, 보다 노골적으로 '그건 그 쪽이 알아야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대응함으로써 윤리적 갈등 없이 난처한 상황을 헤쳐 나갈 수 있는 요령들도 익혀 나가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협상과정에서 변호사-고객-상대방 간에 맺어지고 전개되는 복잡한 dynamic을 고려할 때 변호사가 취하는 전술이나 요령만으로 윤리적 문제를 극복하는 데는 일정한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으며, 궁극적으로는 협상에 참여하는 모든 주체가 지켜야 할 룰을 합의하고 이에 기초하여 협상을 전개하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Harvard Law School의 Harvard Negotiation Project에서 협상에서 지켜야 할 모범 code를 제정한 후 변호사와 고객이 이에 관해 미리 토론, 합의한 후 협상에 임하기를 권유하는 것은 결코 가벼이 볼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황승화 변호사(법무법인 지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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