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2013년 6월 20일, 인도네시아의 제1심 법원(West Jakarta District Court)은 인도네시아 법인(PT. Bangun Karya Pratama)과 미국 법인(Nine AM Ltd.)이 영문만으로 작성한 대출약정서는 무효라고 판결하였습니다(2013년 6월 20일 선고, 사건번호 No.451/Pdt.G/2012/PN.Jkt.Bar).
구체적으로 제1심 법원은 문제된 대출약정서가 인도네시아에서 2009년 7월 9일부터 시행된 법률 2009년 제24호(Law No.24 of 2009 concerning Flag. Language and symbol of State and National Anthem, 이하 '인도네시아 언어법')에 포함된 '계약 당사자 중 하나가 인도네시아 정부 기관, 법인, 개인일 경우 계약이 반드시 인도네시아어로 작성되어야 한다'는 조항을 위반하였다는 이유로 동 대출약정서의 무효를 선언하였습니다. 관련된 세부 내용은 [별첨] 지평 Legal Update(2013년 11월 18일자)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2. 상급심의 판단
위 1심 판결에 대하여 인도네시아 법조계에서 많은 논란이 제기되었고, 항소심 또는 대법원은 1심 판결과는 다른 결론을 내릴 것이라는 전망도 상당히 많았습니다. 그러나 2014년 5월 7일 자카르타 고등법원은 제1심 판결과 동일하게 영문만으로 작성된 대출약정서는 여전히 무효라고 판시하였으며(2014년 5월 7일 선고, 사건번호 No.48/Pdt/2014/PT.DKI), 이에 불복하여 미국 법인(Nine AM Ltd.)이 제기한 상고심에서 인도네시아 대법원은 상고를 기각하고 자카르타 고등법원의 판결이 정당하다고 판시하였습니다(2015년 8월 31일 선고, 사건번호 No.601/K/PDT/2015).
통상적으로 인도네시아 대법원이 판결을 선고할 경우 그 홈페이지에 판결문을 공개하나, 확인한 바에 따르면, 위 사건에 대한 대법원의 판결문은 아직까지 공개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대법원이 어떠한 법적 논리로 고등법원의 판결을 인정하였는지 아직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인도네시아 대법원의 판결은 확정적이고 구속력이 있으며, 다만 위증, 거짓 증거, 중복제소 금지, 판사의 명백한 실수 등 중대한 절차 및 내용상 오류가 있는 경우에 제한적으로 재심을 청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재심 청구는 대법원 판결 선고일로부터 180일 이내에 제기되어야 하는데, 비록 아직 대법원 판결에 대하여 미국 법인(Nine AM Ltd.)이 재심을 청구하였는지 여부는 확인되지 않으나, 기간의 경과를 고려해 보았을 때 재심 청구 기간은 경과했을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따라서 기간 내 재심 청구가 없었다면, 대법원 판결은 확정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인도네시아 민사소송법은 영미법계와 달리 선례구속의 원칙을 따르지 않으므로 향후 언어법이 문제된 다른 사안에서 이번 판결과 다른 판결이 내려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음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3. 시사점
우선, 인도네시아 법원이 본 사건에 대해 계약서가 무효이므로 대여금 전액의 반환의무가 없다고 판시한 것은 아니므로 미국 법인(Nine AM)의 실질적인 피해가 크지는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출약정서 상 이자지급의무 기타 계약서가 유효임을 전제로 한 규정들 모두 무효가 될 수 있으므로, 미국 법인(Nine AM)은 이자지급청구 등이 불가능하게 되는 경제적 손실을 입게 될 수 있습니다. 당장 이 사건에서 대출약정서에 부수하여 체결된 담보계약서(인도네시아어)도 담보계약의 부종성의 원칙에 따라 무효로 선언되어 미국 법인(Nine AM)은 담보권을 행사할 수 없는 불이익을 입게 되었습니다. 아울러, 가정적이기는 하나 예컨대 인도네시아측 당사자의 장래 발생하는 채무가 내용의 대부분을 구성하는 계약의 경우 무효가 선언된다면 그로 인한 타격은 상당할 수 있습니다.
상급심에서도 인도네시아어를 채택하지 않은 계약서를 무효로 선언한 이상, 비록 향후 다른 사건에서 다른 판결이 내려질 수 있다 하더라도, 외국계 사업가로서는 관련 법적 리스크를 최소화하기 위한 대응이 필요해 보입니다.
상급심에서도 인도네시아어를 채택하지 않은 계약서를 무효로 선언한 이상, 비록 향후 다른 사건에서 다른 판결이 내려질 수 있다 하더라도, 외국계 사업가로서는 관련 법적 리스크를 최소화하기 위한 대응이 필요해 보입니다.
가장 바람직한 방법은 인도네시아어 계약서와 영어(또는 한국어) 계약서를 동시에 작성하는 것입니다. 특히 이번 사건은 인도네시아법을 준거법으로 하는 계약에 대하여 판단한 것이므로 준거법을 인도네시아법으로 하는 경우에는 계약서를 영어(또는 한국어)와 인도네시아어로 각각 작성하는 것이 필요할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이미 영어 또는 한국어만으로 계약서가 체결되어 있다면 이제라도 이를 인도네시아어로 번역하여 기존 계약서에 별첨 형식으로 추가할 필요가 있습니다. 번역비용이나 추가적인 계약 체결 절차 등에 부담과 계약 전체가 무효로 되는 위험 사이의 비교형량을 통해 결정하여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참고로, 이러한 추가 계약서 작성은 2009년 이후에 체결된 계약에 적용될 수 있을 것이며, 그 이전에 체결된 계약에까지 소급적용된다고 보기는 힘들다는 것이 대체적인 견해입니다(이 사건 제1심 판결 이유에서도 이와 유사한 취지로 설시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과 달리 계약의 준거법을 인도네시아법이 아닌 타 국가 법률(예컨대, 대한민국 민법 등)로 정한 계약에 대해 인도네시아 법원에 소송이 제기될 경우, 인도네시아 법원이 여전히 언어법 위반을 이유로 계약의 무효를 선언한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불운인지는 모르겠으나, 만일 해당 사건에서 인도네시아 언어법을 강행법규로 파악하여 강력한 효력을 부여하여야 한다고 믿는 인도네시아 판사를 만난다면, 예상치 못한 판결을 내릴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 없어 보입니다. 이를 대비하여 인도네시아 언어법을 명시적으로 배제하는 조항을 계약서에 추가하는 방안도 고려해 봐야 할 것입니다.
또한 인도네시아 언어법은 복수 언어가 사용된 계약의 용어 해석에 대하여 이견이 있는 경우에도 인도네시아어를 기준으로 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2009년 12월 인도네시아 법무부는 법률적 구속력 없는 Letter(Non-Binding Letter, 주: 유권해석)을 통해 2개 이상의 언어가 사용된 경우 인도네시아어가 아닌 다른 언어를 기준 언어로 삼는 것은 가능하다는 의견을 제시한 바 있습니다. 따라서 현재 인도네시아의 법률실무는 복수의 언어가 사용되는 혼용 계약서의 경우 영어 등 외국어를 기준언어로 설정한다는 특약을 삽입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더 하여 외국어를 기준 언어로 할 경우 인도네시아 당사자로부터 외국어의 의미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였고 외국어가 우선된다는 데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는 확약 문구를 추가하는 방안 등을 다각적으로 검토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참고로, 국제간 계약에서 영어 등 공용어적 성격을 가진 언어를 기준 언어로 정하는 것은 국제적 관행이며, 인도네시아 법원이 기준 언어에 대한 명확한 법률 규정도 없이 인도네시아어만 기준 언어가 되어야 한다는 판결을 내릴 가능성은 높지 않다는 것이 인도네시아 법조계의 중론으로 보여집니다.
추가적으로 인도네시아의 경우 특별법에 의하여 인도네시아어로 계약서를 작성하도록 요구되는 계약이 있으며 이러한 경우에는 향후 상급심에서 인도네시아 언어법에 대한 해석이 달라지더라도 인도네시아어로 계약서를 작성하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대표적인 것으로 인도네시아 노동법상 근로계약서 등이 그러합니다. 특히, 노동법 제57조에 따르면, 만일 2개 이상의 언어가 근로계약서에 사용된 경우 인도네시아어가 우선한다고 명시하고 있으므로 주의를 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