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
최근 대법원은 회사가 근로자 과반수로 조직된 노동조합의 동의를 받아 취업규칙에 임금피크제를 도입하였더라도, 근로자의 개별 근로계약이 근로자에게 더 유리하다면, 그 근로계약이 변경된 취업규칙에 우선하여 적용된다고 판단하였습니다(대법원 2019. 11. 14. 선고 2018다200709 판결, 이하 '대상판결'). 이 글에서는 대상판결의 의미를 살펴보고, 대상판결에 관한 의문점들을 구체적으로 검토하겠습니다.
2. 대상판결의 요지
가. 사건의 경과
대상판결의 피고는 골프장, 스키장 등을 운영하는 회사이고, 원고는 피고에서 2003년부터 2016년경까지 근무한 근로자입니다. 원고와 피고는 2014월 3월경에 연봉계약을 체결하여 기본 연봉을 '70,900,000원'으로 정하였습니다.
피고는 2014년 6월경 피고 소속 근로자 과반수로 조직된 노동조합의 동의를 받아 2014년 6월 25일 취업규칙에 해당하는 '임금피크제 운용세칙'을 제정ㆍ공고하였습니다. 위 운영세칙은 정년이 2년 미만 남아 있는 근로자에게는 기준연봉(임금피크제 적용 직전 연봉)의 60%를, 정년이 1년 미만 남아 있는 근로자에게는 기준연봉의 40%를 지급하도록 정하였습니다.
피고가 2014년 9월 23일에 원고에게 임금피크제 적용에 따라 삭감된 임금 내역을 통지하자, 원고는 피고에게 임금피크제의 적용에 동의하지 아니한다는 의사표시를 하였습니다. 이후 피고가 삭감된 임금을 지급하자 원고는 기존 연봉계약에 따른 임금과 피고가 지급한 임금 사이의 차액을 구하는 소송을 제기하였습니다.
1심판결(수원지방법원안양지원 2017. 6. 23. 선고 2016가단115485 판결)은 피고의 임금피크제가 유효하므로 원고에게도 적용된다고 보아 원고의 청구를 모두 기각하였고, 항소심판결(수원지방법원 2017. 12. 7. 선고 2017나68660 판결)도 원고의 항소를 모두 기각하였습니다.
나. 대법원의 판단
대법원은 원고의 상고를 인용하여 원심판결을 파기하였습니다(대상판결). 대상판결은 취업규칙보다 개별 근로자의 근로계약이 근로자에게 유리한 경우에는 근로계약이 취업규칙에 우선하여 적용된다고 판단하였습니다. 대상판결은 나아가, 이 사건의 경우 근로자의 근로계약에서 정한 연봉액이 취업규칙보다 유리하므로 근로계약에 따른 연봉액이 적용된다고 판단하였습니다.
3. 대상판결의 검토
가. 대상판결의 구체적 쟁점 및 쟁점별 판단
> 대상판결은 취업규칙과 개별 근로계약 사이의 적용우선순위에 관하여 판단하였을 뿐, 임금피크제를 도입한 취업규칙 변경의 효력 자체에 관하여 판단한 것은 아닙니다. 즉, 대상판결은 취업규칙이 적법하게 변경된 것을 전제로, 다만 특정한 근로자(원고)에 관하여 취업규칙이 우선 적용되는지 혹은 해당 근로자의 개별적인 근로계약이 우선 적용되는지에 관하여 판단한 것입니다. 한편 대상판결은, 취업규칙보다 유리한 근로조건이 근로계약(연봉계약)에 구체적으로 명시된 사안으로서, 이러한 사안을 전제로 한 것입니다.
이를 종합하면 아래와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① 대상판결에도 불구하고, 사용자가 근로자의 과반수로 조직된 노동조합 또는 근로자 과반수의 동의를 얻어 적법하게 취업규칙을 변경하여 임금피크제를 도입할 수 있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② 다만 대상판결에 따르면, 연봉액 등 근로조건이 명시된 근로계약(연봉계약)이 존재하고, 그 근로계약이 변경된 취업규칙보다 근로자에게 유리한 경우 위 근로계약(연봉계약)이 변경된 취업규칙에 우선하여 적용된다.
③ 따라서 위 근로자가 근로계약의 변경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그 근로자에게는 해당 근로계약이 그대로 적용되므로, 임금피크제에 우선하여 적용된다.
그러나 대상판결만으로는 여전히 여러 가지 경우의 법률관계에 관하여 의문이 남을 수 있고, 대상판결에 대한 비판도 있습니다. 아래에서 차례로 검토하겠습니다.
나. 임금피크제에 반대한 근로자에 대한 취업규칙 적용 여부
취업규칙이 근로자 과반수로 조직된 노동조합 또는 근로자 과반수의 동의를 거쳐 적법하게 변경되었다면, 변경된 취업규칙은 근로자 개개인의 동의를 얻을 필요 없이 유효합니다(대법원 1994. 5. 24. 선고 93다46841 판결). 따라서 이와 같이 변경된 취업규칙은 근로자가 개별적으로 동의하였는지 여부와 관계없이(즉, 그 근로자가 반대하였더라도) 해당 근로자에게 적용된다는 것이 기존의 대법원 판결입니다(대법원 2008. 2. 29. 선고 2007다85997 판결).
그런데도 대상판결은, 다소 관념적으로 변경된 취업규칙이 취업규칙에 반대하는 근로자에게도 적용되긴 하지만, 단지 해당 근로자의 근로계약(연봉계약)이 위 취업규칙보다 더 우선적으로 적용된다는 취지로 판단한 것으로 보입니다.
다. 근로계약에 연봉액이 명시되지 않은 경우의 법률관계
1) 근로계약에 취업규칙에 따른다고 명시한 경우
근로계약서에 ‘연봉에 관해서는 취업규칙(사규)에 따른다’라고만 기재되어 있다면, 구체적인 사실관계에 따라 위 문구를 어떻게 해석할지 문제 될 것입니다. 다만, 근로계약서에 위와 같이 기재되었을 뿐만 아니라, 노사가 장기간 여러 차례 변경되는 취업규칙에 계속 따라왔다면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변경되는 취업규칙을 포함하여 일반적으로 취업규칙을 따른다는 취지로 보아야 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2) 근로계약상 임금에 관한 규정이 없는 경우
근로계약서에 연봉에 관한 규정이 전혀 존재하지 않거나 연봉은 별도로 합의하여 정한다고만 기재된 경우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 역시 원칙적으로는 당사자 사이의 의사표시 해석이 문제될 것이나, 특별한 사정이 없다면 근로계약을 체결한 근로자와 사용자 사이에는 취업규칙에 정하는 바에 따라 근로관계가 성립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대법원 1999. 1. 26. 선고 97다53496 판결).
라. 단체협약으로 임금피크제를 도입한 경우의 법률관계
단체협약으로 임금피크제를 도입한 경우 원칙적으로 그러한 단체협약이 개별 근로계약에 우선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단체협약에 위반하는 근로계약은 무효이고(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제33조제1항 참조), 단체협약으로 기존의 근로조건을 불리하게 바꾸는 것도 가능하기 때문입니다(대법원 1993. 3. 23. 선고 92다51341 판결, 대법원 2002. 12. 27. 선고 2002두9063 판결 등).
다만, 노동조합 가입 대상이 아닌 근로자 등 단체협약이 적용될 수 없는 근로자에 대해서는 결국 취업규칙이 적용됩니다. 그리고 노사가 단체협약으로 임금피크제롤 도입한 사안에서 법원이 실제로 개별 연봉계약을 배제하고 단체협약을 적용할지는 구체적인 판결을 기다려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 대상판결에 대한 비판적 견해
대상판결에 대하여 비판적인 견해도 있습니다. 첫째, 기존 대법원 판례와 사실상 동일한 사안에서 다른 결론에 이른 점에서 대상판결이 실질적으로는 기존 대법원 판례에 반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둘째, 대상판결은 근로기준법 제94조가 근로자 과반수로 조직된 노동조합 또는 근로자 과반수의 동의로 취업규칙을 변경할 수 있도록 한 취지에 명시적으로 반한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셋째, 대상판결의 경우 과반수 노동조합의 동의를 받아 취업규칙을 변경하였는데, 이는 과반수 노조에 의해 체결된 단체협약과 사실상 동일하다고 볼 여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근로자 과반수의 동의에 의한 취업규칙 변경과 차이를 두지 않았다는 점에서 비판이 있습니다. 넷째, 연봉계약으로 연봉액을 정하였더라도 취업규칙과 달리 정한다는 취지가 아니라면 취업규칙에 따르는 것이 당사자들의 의사일 수도 있는데 대상판결에서는 이러한 쟁점에 대한 판단이 확인되지 않습니다. 다섯째, 일부 개별 근로자가 동의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임금제도를 적용할 수 없다면, 사업장 내에서 통일적인 근로조건을 적용하는 것이 불가능해질 우려가 있습니다.
물론 이미 대상판결과 같은 취지의 기존 심리불속행 판결도 있었습니다(대법원 2017. 12. 13.자 2017다261387 판결). 그러나 다른 한편, 대상판결이 전원합의체 판결은 아니고, 과거에는 대상판결과 실질적으로 상반되는 취지의 대법원 판결도 있으므로 추후 대법원 판결의 추이를 지켜볼 필요가 있습니다.
4. 임금피크제를 도입하였거나 도입하려는 사업장의 대응방안
대상판결로 인하여 임금피크제의 도입 절차나 취업규칙으로서의 효력 자체가 달라졌다고 볼 수는 없고, 또한 대상판결이 대법원의 일관된 판례로 정착할지는 조금 더 추이를 지켜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대상판결에 따르면, 근로자 과반수의 동의를 받아 임금피크제 취업규칙을 도입하는 경우에는 근로계약의 변경에도 동의하는지 함께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집단적 동의 절차와 함께 개별적 동의 절차를 받도록 해야 합니다.
나아가, 앞서 본 바와 같이 임금피크제를 노사합의를 거쳐 단체협약의 방식으로 도입하는 것을 고려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임금피크제와 함께 다른 근로조건을 변경함으로써 취업규칙 변경이 근로자에게 불이익하지 않도록 하거나 또는 근로자의 동의를 용이하게 받는 방법을 고려할 수 있습니다. 가령, 법정 기준 이상으로 정년을 연장하는 방안, 임금감소분에 비례하여 근로시간을 단축하는 방안 등을 고려할 수 있습니다.
5. 나아가며
대상판결은 근로조건 자유 결정의 원칙을 인용하며, 노사가 합의하여 정하는 근로계약과 ‘사용자가 일방적으로 정하는’ 취업규칙을 서로 구분되고 대비되는 존재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대상판결은 근로조건 자유결정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서는 취업규칙의 변경에도 불구하고 취업규칙보다 유리한 근로계약이 우선 적용되어야 한다고 판단하였습니다.
그런데, 판례가 이러한 시각에 따른다면 오히려 취업규칙의 변경 법리에 관해서도 기존의 입장을 재고할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생깁니다. 가령, 지금까지 판례는 취업규칙이 곧 근로조건이라는 이해 하에 취업규칙의 변경 과정에도 ‘근로조건 대등결정’의 원칙을 적용하거나 취업규칙의 불이익 변경에 법문에도 없는 ‘회의방식’ 등 매우 엄격한 요건을 요구해 왔습니다. 심지어 일부 판결은 적절한 회의방식이 준수되지 않으면, 사용자, 근로자 과반수, 적용대상 근로자 개인 모두가 동의하였더라도 취업규칙이 불이익하게 변경될 수 없다는 취지로 판단하기도 하였습니다.
대상판결을 통해 취업규칙과 근로계약의 관계뿐만 아니라, 취업규칙과 근로계약 각각의 법리에 관해서도 새롭게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