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겪은 장애문제에 관한 두 가지 경험
1. 내 둘째 아들은 심한 청각장애를 가지고 있다. '인공 와우'라는 것을 수술한 뒤로 어느 정도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었지만, 여전히 듣고 말하는 것이 쉽지 않다. 우리 말을 익히는 것도 너무 힘들었던 둘째 녀석이 아빠를 따라 미국에 와서, 미국 학교를 다니며 영어를 배운다는 것은 정말로 버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무 말도 알아들을 수 없는 학교에서, 전혀 말이 통하지 않는 친구들과 함께, 하루 종일 지내야만 하는 둘째 아이는 그래서 우리의 가장 큰 걱정거리였다.
그런데 이런 걱정을 조금이라도 덜게 된 것은 미국의 장애인 교육 시스템 덕분이었다. 둘째가 학교를 다니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IEP 회의라는 것이 열렸다. IEP는 '개별화된 교육 프로그램'(Individualized Education Program)을 뜻하는데, 장애아동을 위해 개인의 상황과 능력에 맞춘 교육 프로그램을 실시하는 것이다. 우리 아이 하나 때문에, 더욱이 미국 시민도 아니며 외국에서 잠시 살러 온 아이를 위해서, 학교 선생님들과 상담교사, 교육구청의 특수교육 담당자들, 청각장애 전문가들이 모두 모인다는 것이 우선 놀라웠다. 그 회의에서는 부모가 참여해서 의견을 개진할 수 있음은 물론이고, 통역사를 요청할 권리까지 부여되어 있었다. 이런 회의를 통해 우리 아이는 작은 특수반에 배치되서 보조교사의 도움까지 받으며 공부를 하게 되었다. 여기에 전문가의 스피치 및 언어훈련 프로그램이 추가되었다. 물론 우리 요구사항이 모두 받아들여진 것이 아니었지만, 이런 장애인 교육 시스템은 참으로 놀라운 경험이었다.
한국의 특수교육진흥법에도 이미 1994년부터 미국의 IEP를 참고해 '개별화 교육'이라는 조항을 두었다. 그러나 우리 아이가 초등학교 6년을 다니는 동안, 나는 한번도 미국에서와 같은 회의나 배려를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2. 미국에 있으면서 접한 판결 중 내 눈길을 끌었던 것이 있었다. 작년 말쯤 나온 판결인데, "시각장애인이 쉽게 구별할 수 없는 미국의 지폐는 시각장애인에 대한 차별"이라고 하면서, "그 시정을 권고"하는 판결이었다.
미국 시각장애인 협회가 재무부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이었는데, 이 소송에서 시각장애인 협회는 "미국의 지폐들이 모두 같은 크기와 모양으로 제작되었을 뿐만 아니라, 시각장애인이 지폐들을 서로 구별할 수 있도록 하는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는데, 이는 시각장애인에 대한 명백한 차별"이라고 주장하였다. 판결문에서는 시각장애인들 사이에는 액면금액이 다른 지폐를 서로 다른 주머니에 보관하거나, 10달러는 반으로 20달러는 네 번 접는 식으로 달리 접어 구별하는 등의 노하우를 개발하고 있지만, 근본적으로 시각장애인들이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지폐를 구별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있다. 특히 시각장애인들은 거스름돈을 받거나 지폐를 통용할 때 사기를 당하기 쉽고, 문제는 자신이 속았다는 것조차 인식하지도 못하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판결에서는 이것이 장애인에 대한 차별인지, 과연 법을 위반하는 것인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기준이 필요하다고 한다. 첫째로는 개인이 정부의 프로그램이나 활동으로 인한 수혜에 의미있는 접근을 하고 있는지를 고려해야 한다. 둘째는 이를 위해 정부에 과도한 재정적, 행정적 부담을 주거나 프로그램의 성질을 근본적으로 변경시키는 것인지도 함께 살펴야 한다.
판결에서는 세계 각국의 사례를 살펴보고, 시각장애인들이 미국의 달러화를 구별할 수 있도록 변경하는 방법과 비용들을 살펴보면서, 재무부가 시각장애인들이 달러화를 쉽게 구별할 수 있도록 도안하거나 제조하지 않은 것은 미국 재활법을 위반한 차별이라고 결론내리고 있다.
새삼스럽게 안 일이지만 한국의 지폐에는 이미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가 표기되어 있고, 크기도 각각 다르다. 그러나 장애 관련 단체들은 "지폐의 크기만으로는 지폐를 식별하기 쉽지 않고, 우리 지폐의 점자 표기방식에 문제가 있어 실제로 시각장애인들이 이를 구별하는 것이 쉽지 않다"고 주장하고 있다. 시각장애인들에 대한 설문조사에 의하면 91%의 시각장애인들이 지폐에 인쇄되어 있는 '점자 그림'으로는 화폐의 액면가를 식별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고, 새 지폐가 기존 지폐에 비해 점자표기 방법이 개선되었느냐는 질문에서는 응답자의 93%가 '개선되지 않았거나', '잘 모르겠다'고 응답했다는 것이다. 이들 단체는 국가인권위원회에 우리 지폐가 시각장애인들을 차별하고 있다고 진정을 제기하였다. 눈을 감고 지폐를 한번 만져보라. 그리고 오로지 손으로 금액을 구별해보라. 소수자를 배려하고 사랑하는 일에 모두가 흔쾌히 동의하는 사회가 되기를 소망해본다.
임성택 변호사(법무법인 지평, 미국 University of California at Los Angeles 유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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